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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의미

 

존재의 의미는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이다. 모든 사물의 근원에는 존재가 자리하고 우리는 주변의 존재를 인식함에 있어 그것이 놓여진 자리와 외형의 관계를 바라본다. 인식과 현상은 존재가 드러날 때 비로소 시작 된다. 존재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 세계를 바로 이해하고 그 질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선행되어 파악되어야할 과제이다.

존재란 공간 속에 있지만 그것을 구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벽 속에 갇힌 어떤 사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벽으로 둘러싸여진 공간에 존재한다. 사물의 입장에서 벽의 존재는 외부세계의 공간이지만 벽의 입장에서는 공간과 사물이 자신의 내부세계의 공간과 존재로 작용할 수 있다. 벽은 그 자체의 물성과 형태(벽의 두께와 면적)속에도 자신의 존재(벽)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둘러싸인 내부에도 공간과 존재(사물)를 안고 있고 벽의 외부는 다른 공간이 점유(占有)하고 있으며 그 밖에는 또 다른 우주공간이 존재한다. 다시 사물의 관점으로 돌아가서 사물은 세 가지 공간에 자리 하는데 외형 속 공간과 벽과 자신 사이의 공간 그리고 벽의 밖에 있는 공간이다. 다시 말하면 공간과 존재의 의미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즉, 공간 속에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삼차원의 지속이며 무한히 분할 될 수 있고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것과 같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공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주변 환경으로 해석 되지만 앞서 언급한 내용과 결부해서 생각해 보자. 생물이란 존재로 생겨난 공간은 그것의 내부에 있는 ‘존재 속 공간’ 생물이 살아가는 환경인 ‘존재 밖 공간’ 그리고 살아가는 영역 너머의  ‘존재가 부재(不在)된 공간’ 등의 세 가지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있어서 예술과 공간의 문제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그는 예술에서 입체예술에 한정하여 근원현상으로서의 공간을 사유한다.  첫 번째의 공간의 문제는 작품을 감싸는 공간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때 드러나는 것은 조각 작품의 “사물을 감싸는 공간”은 이미 제시된 공간에 작품이 설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이 놓인 자리와 작품존재로 인해 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가 방위와 주변 기운의 흐름을 개시하는 것이다. 즉 세계는 자리로써 사물과 함께 존재사건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모든 공간과 그 속의 사물을 인식하는 존재자체에 적용된다.

두 번째의 공간은 어떠한 형상이 만드는 볼륨 그 자체에 의해서 포위 되어진 공간이다. 이것은 ‘표면을 통해 외부에 대한 내부의 경계를 형성하고, 그 외부에 대한 경계인 표면이 내부를 둘러싸고 있다.’ 부피와 체적을 나타내는 볼륨을 그 어원의 의미인 감쌈 혹은 둘러쌈의 유래에서 자리 혹은 공간의 문제에로 넓혀 사유하자면 볼륨으로서의 공간은 ‘둘러싸여진 부피’ 가 된다. 그러나 완전히 분리된 경계를 지니는 공간으로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즉, 작품의 표면에 의해 감싸진 내부의 공간은 작품의 표피를 통해서 외부와 맞닿아 있으며 결코 고립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의 내면에 상응하는 공간이다. 예컨대 우리는 작품의 표피를 보더라도 그것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재료에 대한 경험이나 관찰에서 유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존재에 관한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공간의 문제는 공허로서 존재하는 공간의 문제이다. 빈공간이란 일반적으로 가득 찬 공간의 결여 태로서 간주되는데 하이데거는 이것을 정반대로 말한다. 그는 빈 공간을 결여가 아닌 산출로 사유한다. 즉 공허라는 것은 다시 채우기 위한 작용을 내재하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예술에서도 예리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구체적인 형태를 지워감으로서 오히려 정리된 형상과 존재를 얻게 된다. 이런 세 가지의 관점에서 고찰된 공간 중에서 본인의 작품을 통해 안과 밖의 공간, 표피의 문제 그리고 부재의 공간을 모두 드러내는 존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공간을 무한함으로 확장시킨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간을 점유하고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훼손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결국 존재와 공간의 깊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감상자가 바라보는 것은 재료나 형상이 아니라 그 배후의 존재의 의미이다. 그러한 존재는 작품의 전면에 나타난 의미 너머에 있으며 그것의 해체로 무(無)를 얻음으로서 현전하는 것이다. 무의 발견은 무한함으로 확장을 의미한다. 무한함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무한함의 현상학은 우리들을 곧바로 우리들의 상상하는 의식으로 돌려보낼 것이리라는 것이다. 무한의 이미지들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내부에 순수한 상상력의 존재를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때, 예술 작품이란 그, 상상하는 존재의 실존성의 부산물 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즉, 존재의 실존을 차라리 그것이 놓여 있는 자리 외부의 배경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무한함은 작품의 존재 내면에서 기인하여 외부공간으로 연장되어 전개되는 것이다. 즉, 사물의 성향을 지닌 조각은 공간과 조우(遭遇)하며 초월적인 배후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비로소 존재는 무를 향하여 그것이 있던 그대로를 초월한 무한함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존재에 무한함을 가능 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창과 문이다. 그것은 안과 밖의 공간이 닿을 수 있는 구멍과 내부 혹은 외부를 가시화할 수 있는 투명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투명한 벽이 있다면 그것은 벽의 내부에 있는 존재를 벽의 외부 공간 너머의 우주로 바로 닿게 한다. 본인은 무한함으로 가득한 내밀한 존재를 가진 작품을 간절히 원했고 근작에 와서는 메타포 쌓인 투명한 공간의 사유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 생각은 릴케의 시를 접한 후부터 출발했는데 그의 시를 들어 보기로 하자.

 

     공간은 우리들 밖에서 사물들로 퍼져나가 그것들을 표현한다

     만약 네가 한 나무의 생존을 훌륭히 이루어 내련다면

     그것에 내부 공간을 주라, 네 안에

     그 존재가 있는 그 공간을,

     그것을 속박으로 둘러싸라. 하나

     그것은 경계가 없고, 네 자신의 포기

     한 가운데서 질서를 찾을 때에야

     정녕 한 나무가 된다.

 

이시의 마지막 부분은 존재가 무에 다다를 때 오히려 더욱 팽창함을 의미한다. 존재는 외부의 공간과 내밀한 공간을 넘나들며 거대해 짐을 의미한다. 이것은 회화가 가진 평면의 내부에서 외부공간으로의 확장과는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즉, 공허는 자리나 사물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자리와 동시에 공간의 열림이 만들어지며  나의 투명한 공간은 그것을 매개하기 위해 작용한다. 

 

 

투명한 공간으로의 확장

 

내밀한 공간과 세계의 공간, 이 두 존재가 어울리는 것은 그들의 무한함으로 향해 갈 때이다. 내부의 공간이 작품의 표피를 통해 외부로 드러날 때 무한한 존재는 우리에게 각인된다. 투명함이란 이러한 안과 밖을 합병으로 이끌기도 하며 그 것으로 가시화된 입체는 공간을 완전히 점유하지도 않고 자리하는 존재를 보여준다.  

본인은 어린 시절을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랐고 이후 바다는 그리움과 거대한 마음속 공허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것은 깊은 물속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은 느낌이며,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물의 깊이에 대한 동경은 잠수 경험을 통해 체화 되었고, 수면 밑의 부피 속에서 느낀 존재들은 바닷물의 밀도와 압력으로 더욱 예민하게  다가왔다. 깊은 바다의 체험은 존재와 외부공간의 관계를 인식하는 촉매로 작용했고 작품과 그것이 놓여있는 공간전체를 침수(沈愁)시키기에 이르렀다. 투명한 물질로 공간을 침수시키는 상상은 작품의 표면의 투명함이나 구멍으로 내부의 공간과 닿아 있다. 

구체적 공간, 고도로 질적인 공간 속에서 존재의 혼용과 공간의 침수에 대한 상상의 문제에서 사막에서 쓴 필립 디올레(Philippe Diole)의 글은 너무나 적합해서 그의 글 전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전에 나는, 깊은 바다를 체험한 이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다시 될 수는 없다고 쓴 바 있다. 지금이 순간 (사막의 한가운데 있는)과 같은 순간에 나는 그 증거를 얻는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걸음을 계속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이 사막의 외관을 물로 가득 채우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중략)나는 지어낸 침수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유동적이고 빛나며 유익하고 밀도 있는 물질 가운데 몸을 옮겨 가고 있었는데, 그 물질은 바닷물 이였고 바닷물의 추억이었다. (중략) 내 피곤마저 그로인해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내 무게는 몽상 속에서 상상적인 물 위에 받쳐져 있었던 것이다.(중략) 나는 내 내부에, 바로 깊은 바다의 추억들에 다름 아닌, 빛나는 반사된 이미지들을, 반투명의 두꺼움을 지닌 채, 걸어갔다. 필립 디올레는 우리들에게 다른 세계를 옮겨서 보여주고 있다. 공간을 투명함으로 가득 채워 넘치게 하고 그 밀도 속에서 우리를 존재로 인도한다. 

동양에서의 전통적 공간도 역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본래의 공간을 의미하며 해맑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텅 빈 공간 즉  순응하는 순수한 무의 공간 이였다. 이러한 무한함으로 다가서면 불투명한 모든 물체는 투명하게 보이고 모든 존재와 공간의 내부를 영롱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적 관계에서 투명함은 무한함을 줄 수 있다. 본인의 투명한 공간이란 존재와 그 내부의 공간 외부의 공간을 동시에 바라보기 위한 무한함의 표상이다.

 

 

발상의 시작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육지와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영역과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근대화 이후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해온 과학기술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지구와 오랜 균형을 깨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본인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환경에 관한 생각에서 시작 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안정적 관계를 심해의 개체에서 찾고자 했으며 그것의 존재는 작품의 외형을 결정하는 소재가 되었다. 작업의 가장 기초하는 개념은 본인이 여행과 매체를 통해 느끼고 가정한 세 지역의 상황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1. 변화의 지점

갈라파고스 군도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잉태된 곳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 곳이다. 비글호의 자연학자로서 다윈은 새로운 지역을 방문할 때 마다 많은 새로운 관찰을 했지만 갈라파고스에서 만큼 결정적 증거들을 얻은 곳은 없었다. 

이런 갈라파고스 제도가 최근 인간의 영향으로 많은 피해를 받고 일부의 생물들은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예컨대, 2002년 갈라파고스군도 인근 해역에 기름 유출로 이구아나의 수가 급감하였다. 프린스턴대학의 “마틴 와이켈스크”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유출지역에서 48㎞떨어진 산타페의 경우 이구아나가 62%정도 멸종한 것으로 드러났고 그 피해 영역이 120㎞로 조사 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인간의 활동으로 자연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 아침공기! 만약공기를 마시려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병에 담아 가계에서 팔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침공기는 아무리 차가운 지하실에 넣어 둔다 해도 정오까지 견디지 못하고 그 전에 벌써 병마개를 밀어 젖히고 새벽의 여신을 따라서 서쪽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라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되겠다.”라는 소로우의 말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인류도 같은 길을 강요당할 수 있다. 

 2. 심연의 유영

두 번째는 마리아나해구에서 살고 있는 심해생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심해에는 생명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현재는 심해생물이 1천만 종 이상발견 되었다. 매우 극소수의 인간만이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심연을 유유히 유영하는 생명의 존재는 특별하다. 심해의 환경은 엄청난 수압과 어두움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인접한 장소라도 중복되는 생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이 존재한다. 이들은 지구의 생태계균형을 유지하는데 어떤 역할과 진화과정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막대한 유전적 다양성을 보유하고 있다. 

마리아나는 인간이 아직 가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다. 오직 자연만이 존재하는 영역인 것이다.  

 3.시나리오의 완성 

카이코라는 뉴질랜드 남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포구이다. 해저 지형의 기복이 매우 기묘해서 대륙붕의 완만한 경사가 없이 바로 심해가 해안가부터 시작되는 깊은 절벽이 수면 밑으로 숨어있는 바다이며 고래들이 해안에 근접하여 먹이 활동을 하는 곳이다. 2005년 이곳을 한 달간 여행하며 인간과 자연의 존중에 대해 가장 완전한 곳이라고 느낀 곳이기도 하다. 마을의 사람들은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을 존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가장 이상적인 세계인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가정을  부호로 도식하자면 아래와 같다.

     카이코라         인간=자연          

     갈라파고스      인간>자연

     마리아나         인간<자연

마리아나는 자연의 절대 영역이고 갈라파고스는 인간이 급속하게 황폐화 시킨 영역이며 카이코라가 두 존재의 적정한 공존의 영역으로 가정한 것이다. 결국 본인은 바다와 유기적 형태의 심해생물과 카이코라에서 본 잠수직전의 향유고래를 미래 지향적 인간과 자연의 공간의 상징으로 설정하게 되었고 이것은 작품의 외형을 형성하는 볼륨의 이미지로 작품에 개입한다. 심연에 존재하는 생명체에서 차용한 작품의 이미지속에는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구조가 투명한 표면을 통해 보여 이것은 인간적 영역의 상징으로 작품의 외형과 마주 닿아 자연과 인간의 적정한 영역인 카이코라를 보여준다. 

  

재료의 선택

오늘날의 미술에서 재료의 선택과 다룸은 매우 예민한 문제이다. 그토록 독창적이고 그토록 암시적이며, 미술의 형태에 그토록 까다롭게 구는 이 물질은 미술의 형태에 일종의 매력으로 작용하고, 역으로 물질은 미술의 형태를 심도 있게 변모하기 때문이다. 작업에 있어 재료는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같이할 때 작품은 더욱 완전해 진다.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고려할 요소로서 투명함이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연질PVC와 유리는 투명한 ‘미래의 재료’로서 구조적인 구멍과 함께 안과 밖의 공간을  확장하고 작품의 존재를 무한하게 해준다. 작품의 내부가 보이는 것은 신비감을 없애서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하지만 내부의 존재가 외부의 새로운 공간을 만나는 계기를 제공한다.

듀랄루민은 금속이지만 철이나 구리와는 달리 차갑거나 무겁지 않는 중성적인 소재이다. 중성적 재료의 특성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전통적인 조각재료의 유기적이거나 자연적인 물성과는 달리 합성을 통해 만들어낸 물질이라는 코드는 인간적 공간을 상징하는 구조를 제작하기에 적합했다. 또 그것은 요즈음 건축에서 유리와 함께 마감재로 활용되는 매우 현대적인 재료이기도 하다. 특히 가벼우면서도 매우 강한 성질을 지녀 항공기나 선박의 구조재로 사용되는데 이것은 침수된 공간 속의 유영을 연출하고 유기적 형태를 극대화하기 위해 매달기의 수법으로 작품을 설치하는데 유용하다. 

바다는 깊어질수록 투과해서 들어오는 빛이 흡수되어 푸른색 공간이 되는데 이는 수압이 상승함과 함께 존재의 의미가 깊어지는 초월적 공간을 의미한다. 네온은 간접적으로만 작품의 내부에 설치하여 푸르스름한 공간을 만들어 투과되어 들어온 빛처럼 심해 속으로 침잠(沈潛)되는 듯한 상상을  불러낸다.

 

 

공간의 오버랩 

우리는 도시의 공간에서 살아간다. 빌딩의 숲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바쁘게 움직인다. 도시는 매우 인간의 삶이 강조된 영역이며 그 속의 빌딩은 도시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남극의 얼음 밑은 마치 마리아나의 심연과 같이 극히 자연적인 영역이다. 그러나 매우 정적인 얼음 밑의 공간은 현대 사회의 냉정함과 중압감과도 같은 유사한 밀도를 지니며 부유하듯 유영하는 고래들의 움직임은 마치 도시속의 자신과 같다. 고래와의 유영을  통해 자아를 확인하며 고래와 현대건축은 자연과 인간의 존재근원을 상징한다. 한 공간의 시점 속으로 겹쳐서 투영함으로  두 장소의 서로 다른 공간의 이중상은 합치되며 조정된다. 이것은 안과 밖의 공간의 교차와 함께 존재를 드러내고 함축한다.

좁은 땅위에 넓은 공유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적 건축의 친화적 기법이 아닌 알루미늄 페널과 복층유리로  마감된 첨단의 구조물에서 살아간다. 복잡하고 어쩌면 답답한 듯한 느낌의 현대건축 재료와 구조를 이용해서 생물체의 유기적 이미지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순수한 심해생물의 이미지와 고래의 형상을 담고 있는 표피와 인간적 공간의 중심인 도심 속 빌딩의 구조가 투명함으로 교차할 때 두 존재(자연과 인간)는 공존에 도달하게 된다. 

전시 공간에는 빙산과 해수면, 수염고래와 고래상어가 등장하지만 정작 어디에도 향유고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의심에서 기인하며 희미한 존재마저 사라짐을 의미하지만 부재된 존재는 무를 얻고 나아가 무한함으로 향하는 의미를 제공한다.

 

           박기진

 

참조, 인용, 정의

박겸숙 「하이데거의 “존재사건으로서의 예술 」 홍익대학교 미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4. p86-87 참조  하이데거의 예술과 공간이라는 논문에서 발췌된 내용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역,  민음사, 1990,  p342.

위의 책 p361~362 재인용, 릴케의 1924년 작,「文學 Les Lettres」지  제 4년 14,15,16  합병 호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역,  민음사, 1990,  p366~367 재인용, 필립 디올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막 」, p178.

M. 듀프렌 외, 「예술의 세얼굴」, 임영방 역, 중앙신서, 1981,  p50 참조.

필립 디올레(Philippe Diole)는 프랑스의 여행가이며 <위대한 바다의 패자>등의 저서가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9세기의 인물이지만 21세기적 환경에 대한 발상을 한 사회학자이며 저서로는 <시민의 불복종>과 <월든>등이 있다.

하마시다 다께시, 「바다의 패러다임」, 김정환 역, 다리미디어 2001,  p13 참조.

카이코라는 뉴질랜드 토착민인 마오리족의 언어로 ‘크레이 피시를 먹다’라는 뜻으로 해류와 지형으로 고래를 비롯한 해양생물이 많은 곳이다.

앙리 포시옹, 「형태의 삶」, 강영주 역,  학고재 , 2001,  p74.

장 보드리야르, 「사물의 체계」, 배영달 역,  도서출판 백의,1999,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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